2017. 3. 1. 22:09ㆍ러닝, 마라톤
더 로드 (The Road)
세기말 또는 인류멸망 이후의 절망을 그리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어떤 원인에서 시작 되었든지 간에 말입니다.
더 로드(The Road)는 모든 질서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주인공 남자와 그의 아들이 살아가는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상대적으로 게임이나 영화를 통해 이런 세계를 많이 엿봐왔었기 때문인지
감상평이나 추천사에 나온 것 같은 강렬하고 장엄한 감동은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다시 한번 읽으면서 더 깊숙이 상황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이동하는 장면마다, 그리고 방문하는 곳마다 그려지는 작가의 섬세한 묘사는
그들이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물품들을 늘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아주 잘 살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고 있으면 오랜 기간동안 몸으로 체득한 생존을 위한 시선의 이동을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설 속에서는 분명히 주인공 외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결코 서로에게 만나고 싶은 존재가 아닙니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다.’라는 소설 속 구절처럼 다른 일행과의 만남은 긴장과 의심의 연속일 뿐이며,
사람들이 만나는 장면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교차합니다.
이전의 많은 소설들이 이런 상황을 그려왔기에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묵묵히 두 주인공의 회색여정을 함께 하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다 읽고 나니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장면이 담긴 수묵화를 떠올리게 되네요.
핵폭발을 암시하는 구절들
더 로드에서 한번도 정확하게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핵폭발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자연 또한 흐트러져 있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 구절들만 따로 모아봤습니다.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아래 내용을 미리 보는 것이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습니다. : )
도시는 대부분 탔다.
문간에는 말라붙어 가죽만 남은 시체 한 구.
빛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17page)
암흑 너머로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는 침침한 해의 자취. (19page)
이윽고 지하철처럼 그들 밑을 지나가더니 밤 속으로 멀리 사라졌다. 소년은 울면서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머리를 남자의 가슴에 파묻었다. 쉬. 괜찮아.
너무 무서워요.
알아. 괜찮아. 이제 지나갔어.
뭐였어요, 아빠?
지진이었어. 이제 사라졌어. 괜찮아. 쉬. (34page)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크고 긴 가위 같은 빛에 이어 일련의 낮은 진동. 남자는 일어서서 창문으로 갔다. 뭐야?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가 전등을 켰지만 전기는 이미 나갔다. 창유리에 칙칙한 장밋빛이 번졌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끓고 레버를 위로 올려 욕조의 배수구를 막고 양쪽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 여자는 잠옷을 입고 문간에 서서 한 손으로는 문설주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감싸안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왜 목욕을 하려는데?
목욕을 하려는 게 아냐. (62page)
우린 생존자야. 남자가 등불 건너편의 여자에게 말했다.
생존자? 여자가 말했다.
응.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린 생존자가 아니야. 우리는 공포영화에 나오는 좀비야.
제발 이러지 마. (66page)
그들은 한밤중에 창가에 앉아 가운을 입은 채 촛불을 밝히고 저녁을 먹으며 멀리 도시들이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며칠 밤이 지난 뒤 여자는 침대에서 건전지 등의 불빛을 받으며 아이를 낳았다. (69page)
그들은 불폭풍이 몇 킬로미터씩 탄 자국을 남기고 지나간 땅에 들어섰다. 떡이 된 재가 길에 몇 센티미터씩 쌓여 카트를 밀기가 어려웠다. 밑의 아스팔트는 열에 뒤틀렸다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남자는 손잡이에 몸을 기댄 채 직선으로 길게 뻗은 길을 보았다. 쓰러진 여윈 나무들, 잿빛 진흑만 남은 물길. 시커먼 뼛조각이 쌓인 땅. (216page)
1킬로미터 정도 더 가자 시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스팔트에 반쯤 묻힌 형체들. 입을 벌려 울부짖으며 자신의 몸을 움켜쥔 형체들. (216page)
이 사람들은 도망가려던 거였겠죠. 그죠, 아빠?
그래. 그랬던 거겠지.
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가 없었어. 다 불바다였으니까. (217page)
저 멀리 잿빛 해변이 보였다. 둔한 납빛 물결이 느릿느릿 밀려왔다.
저 바깥 갯벌에는 반쯤 기울어진 유조선이 있었다. (244page)
희미하게 기운 듯한 느낌을 주는 높은 건물들의 덩어리. 남자는 강철 보강재가 열 때문에 물렁해졌다가 다시 굳으면서 건물들이 현실 같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07page)
멀리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있는 검게 타버리거나 녹이 슨 차들. 바퀴의 드러난 테가 시커메진 철사의 고리에 둘러싸인 채, 녹았다가 다시 잿빗으로 굳은 고무 진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타서 재가 된 주검들은 아이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좌석의 용수철 위에 앉아 있었다. (308page)
가끔씩 소설 속 멸망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 의견들도 간혹 눈에 띄지만,
핵폭발과 후속으로 뒤따르는 초고온의 열폭풍으로 인한 것임이 거의 틀림없어 보입니다.
윤리와 도덕, 질서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런 착한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는 믿지만, 직접 몸을 드러내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너무 두렵고 위험한 세상을 살고 있는 두사람을 잘 표현해준
두 장면을 마지막으로 글을 끝낼까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래. 앞으로도.
알았어요.
다른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랬죠. 아빠가 그랬어요.
그래.
그런데 어디 있는 거예요?
숨어 있지.
뭘 피해서 숨어 있는 거예요?
서로를 피해서.
많은가요?
모르지.
하지만 있기는 있죠.
있기는 있지.
* 소설 원작에 충실하다는 평을 받은 동명의 영화 <더 로드>도 있다고 하니, 꼭 찾아볼 생각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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